서 평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 저자 김혜남 | 출판 메이븐 >
글. 양원희
-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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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인생을 전혀 다시 살고 싶지 않다. 여운이 많이 남는 의미심장한 책 제목의 산통을 다 깨는 말이지만, 진짜 그렇다. 학창 시절 전교권에서 놀던 성적이 중요한 때 우수수 떨어지면서, 부모님이 학부모 임원 자리를 거절하면서,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부잣집 딸이었던 친구는 ‘뜨는 해’, 양원희는 ‘지는 별’이라는 기가 차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대학도 한 번에 못 갔고 재수를 했으며, 원했던 대학은 결국 들어가지 못했다. 취직은 한 3년간 더럽게 안됐다. 지금은 운동장 같은 남편을 만나 든든한 아들 셋을 두고 있으니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지만, 아들 셋 육아가 고된 것은 사실이다. 둘째를 출산하면서는 하혈을 너무 많이 해서 기절했고, 피 다섯 팩을 급히 이송 받아 긴급 수술을 통해 죽다 살아났다. 지금은 불안장애로 약을 5년째 먹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인생을 다시 살라고?
아... 나는 싫다. 너무 고단해서 그 과정을 다시 거치고 싶지가 않다.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정신과 의사인 저자 김혜남이 첫 장에 소개한 나딘 스테어의 시를 읽는데 울컥했다. 그리고 저자가 벌써 마흔이 된 독자에게 해 주고 싶은 말 마흔두 가지를 읽으며, 이렇게 산다면 다시 살아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이번에는 용감히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느긋하고 유연하게 살리라
그리고 더 바보처럼 살리라
매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더 많은 기회를 붙잡으리라
더 많은 산을 오르고, 더 많은 강을 헤엄치리라
아이스크림은 더 많이 그리고 콩은 더 조금 먹으리라
어쩌면 실제로 더 많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어나지도 않을 걱정거리를 상상하지는 않으리라
정신분석 전문의로, 두 아이의 엄마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며느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역할을 다 잘해 내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를 닦달하며 인생을 숙제처럼 살아오다 보니 정작 누려야 할 삶의 즐거움들을 너무 많이 놓쳐버렸다는 사실을 마흔세 살에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해야만 하는 일보다 하고 싶지만 계속 미뤄둔 일들을 먼저 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병마와 싸우면서 고통을 참을 수 없어서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가 있고, 후회할 걸 뻔히 알면서도 타인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할 때도 있다. 늘 평정심을 잃지 않고 사람들에게 유쾌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 와중에 저자가 나는 그런 나를 용서하기로 했다는 말이 깊은 위로가 되었다.
- 어른의 삶, 내가 주체가 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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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중3이 될 아들이 있는 나는, 마음만큼은 아직 여고시절에 머물러 있다. 참 철이 없고 한심하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런 나에게 저자가 건넨 이야기가 참 용기를 준다.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쳐올 때가 있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 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는 내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달려 있다. 그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더라도 그것을 해결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그러므로 남을 탓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남의 역사가 아닌 내 역사를 쓸 수 있고, 남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살 수 있다. 하기 싫은 일과 하고 싶은 일, 꼴 보기 싫은 사람과 오래도록 같이 하고 싶은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수많은 일들을 주체적으로 해결하고 조율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짜 어른의 삶이라고 얘기해 주니 삶의 용기가 다시금 생긴다.
내 성격상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도, 나는 그 사람에게 항상 맞추는 편이다. 거절도 잘 못한다. 상황적으로도 내가 비굴하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울고 싶을 때 더 크게 웃기도 한다. 그런데 그럴 때도 ‘그 사람이 원해서 웃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상황을 원만하게 넘기기 위해서 웃어 주자’라고 마음먹어보니 내 인생의 주체가 내가 되는 기쁨과 만족이 있다.
-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도록 놔두지 말 것
- 나는 몇 가지 트라우마가 있다. 그래서 ‘불안장애’도 생겼다. ‘트라우마’라는 것은 사람이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발생할 수 정신 장애의 일종이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런 나에게 저자는 더 이상 과거가 당신의 현재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해 준다. 과거가 고통스러웠다고 해서 현재까지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법은 없다. 과거가 고통스러웠다면 그것을 잘 지나 온 당신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분명 당신은 행복해질 것이다. 과거의 슬픔을 인정하고 슬픔을 이겨 낸 자신을 대견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믿는다면, 새로운 방식으로 사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 오늘도 버티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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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 스님이 소설가 故 이외수 선생님께 힘들게 사는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존버 정신을 잃지 않으면 됩니다.”
“아, 존버 정신... 그런데 선생님, 대체 존버 정신이 뭡니까?”
“스님, 존버 정신은 존X게 버티는 정신입니다.”
예전에 남편이 나에게 ‘존버 정신’ 하나는 끝내준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게 그리 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버틴다’는 것 자체가 수동적이고 비굴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버틴다는 것이 말없이 순종만 하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고 얘기해 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 누워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게 결코 아니다. 버틴다는 것은 내적으로는 들끓어 오르는 분노나 모멸감, 부당함 등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고, 외부에서 주어진 기대 행동에 나를 맞추면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하는 매우 역동적이면서도 힘든 과정이다.
나는 오늘도 버티는 당신이,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좀 더 여유 있고 편안했으면 좋겠다. 나 자신도 용서하고 남도 용서했으면 좋겠다. 더 많은 실수를 허용해 주었으면 좋겠다. 벌써 마흔이 된 당신이, 이 책을 통해 위로받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