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지 18개월이 지났다는 것을 중재시술학회에서 원고 요청을 받고서 문득 깨닫습니다. 연수를 이미 다녀오신 여러 선생님들도 그러시겠지만 제 삶에서 가장 평화롭고 고요했던 그 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니 나쁜 기억은 대부분 지워지고 좋은 기억만 남아 이 기간에 대한 제 기억 또한 왜곡되었겠지만 저희처럼 바삐 살아가는 심장내과 의사의 입장에서는 연수 기간이야말로 진정한 qurencia라 여겨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미국 연수를 떠나던 2020년 2월 말은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해 전국적인 방역이 한창 강화될 때라 간기능 악화의 걱정 없이 조용히 아들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제 남편은 평범한 회사원이라 자주 미국에 오겠다며 함께 하진 못했습니다. 이미 연수를 다녀온 선배 선생님들의 조언으로 저도 남미 땅을 밟아 보겠다며 그 판데믹의 서막 중에 황열 예방접종도 받았습니다. 저희 집에서 30마일 가량 떨어져 있던 멕시코와의 국경도 한번 넘어보지 못하고 귀국해서 그 예방접종 증명서를 볼 때마다 피식 웃게 됩니다.
저는 UCSD Sulpizio cardiovascular center에서 Anthony N. DeMaria 선생님 교실에서 함께 1년을 보낼 계획으로 연수를 떠났습니다. Sulpizio는 샌디에이고의 부호 가문으로 UCSD에 통 큰 기부를 하여 독립적인 심혈관센터를 열게 해주었는데 센터의 창립멤버가 바로 이 분이십니다. 여기로 연수를 간다고 하였을 때 많은 선배님들이 2000년대 후반에 JACC Editor in chief를 하셨던 이 분이 아직 현역인지 의아해하였는데 아직도 진료 뿐만 아니라 매주 금요일 오후에서 밤까지 펠로우들과 에코 판독을 하고 평일 출근전에는 자전거, 주말에는 서핑을 즐기는 대단한 체력의 소유자입니다. 본인의 희망사항이 브라운발트 선생님보다 조금 더 오래 현역으로 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위트 있는 분이기도 합니다. 첫 주에 출근하자마자 목요일 저녁 5시에 시작된 Cath lab. conference에 저를 초대해 주셨는데 8시가 넘어서도 컨퍼런스가 끝나지 않아 다시 펠로우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다음 날인 금요일 모닝컨퍼런스에도 참석하지 않겠냐 하셔서 8시까지 병원으로 출근을 하여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퇴근을 한 첫 주의 경험은 너무나도 강렬했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은 2주만에 끝이 나버렸습니다. 아침 뉴스에서 해군 정박항으로 코로나 확진자가 타고 있는 크루즈선이 들어왔다는 내용을 보면서 미국도 환자가 늘겠구나 했는데 둘째 주 금요일 오후에 아들이 급히 책과 태블릿PC를 챙겨 오면서 기나긴 lockdown이 시작되었습니다. 월요일 새벽 선생님의 비서로부터 다음 공지가 있을 때까지 집에서 건강히 지내라는 문자를 받을 때만 해도 1-2주면 상황이 해결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당시 병원에서 CABG를 받기로 했던 환자도 elective PCI를 받기로 한 환자의 입원도 모두 무기한 연기한 것입니다. Unprecedented 란 단어의 의미를 깊게 체감하면서 다음주면 나아지겠지 하면서 버틴 것 같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스타벅스가 문을 닫아 즐겨 마시던 커피를 못하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 동네 슈퍼마켓 안의 스타벅스가 영업 중이라 2달만에 마신 라떼의 맛은 제가 마셔 본 중 최고의 커피였습니다.
아이 학교는 2주간의 준비기간을 거치고 실시간 온라인 수업으로 비대면 수업이 시작되었고 엄청난 과제가 쏟아져 A를 받기 위해 아이와 저 모두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습니다. 샌디에이고는 6학년까지 초등학교 과정인데 졸업식도 드라이브 쓰루 형태로 각자의 차량을 멋지게 꾸며 경적을 울리며 퍼레이드 형태로 진행되었고 중학교에서 하는 할로윈 행사도 드라이브 쓰루로 한 경험은 그때 미국에 있었기에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아이의 중학교 생활은 온라인 수업임에도 훨씬 더 짜임새 있었는데 수준별 수업을 한 수학과 영어의 honor 반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아들과 보낸 치열한 학습의 경험도 코로나 판데믹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5월부터 화상으로 드마리아 선생님을 만나 에코 판독 및 연구 진행에 대한 논의를 하였는데 금요일 저녁 7시 무렵 화상 회의가 끝나면 먹었던 아들이 끓여주던 라면 맛이 종종 그립습니다.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해무 낀 토리 파인즈를 지나 라호야 코브까지 다녀오는 드라이브 코스는 비대면의 시기 동안 저희 가족을 버티게 해 주는 힘이었습니다.
[사진] 락다운기간동안 산책하던 오버룩 공원, 라군과 태평양 바다
[사진] 드라이브쓰루로 한 중학교 할로윈 파티
2020년의 혹독한 칩거생활 후 다행히 2021년 봄부터는 학교도 병원도 new normal로 회복되어 다시 랩에 나가 연구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도 일찍 코로나백신을 접종하여 귀국 전 다시 열린 국립공원으로 자동차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그때가 미국을 온 후로 처음 캘리포니아 밖으로 나간 여행이었습니다. 그 여행 중에 누군가 제 카드를 복제하여 한번도 간 적 없는 치폴레 매장에서 수백달러를 결제해서 은행이 곧장 제 카드를 정지시키는 해프닝과 2차선 도로에서 과속하다가 경찰차에 걸려 심장이 떨렸던 경험이 있지만 솔직함을 무기로 다행히 벌금 없이 경고만 받고 풀려난 일도 떠오릅니다. 외딴 고속도로의 주유소에선 가급적 현금 결제를 하는 게 안전하며 과속으로 경찰을 만나도 공손하게 사과하면 1번은 excuse를 해준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사진] A. 라호야 코브의 파도, B. 가이드 투어 덕분에 귀하게 얻은 누군가 찍어준 사진 – 모뉴먼트 밸리 투어,
C. 석양이 지던 토리파인즈 골프장, D. 멀고도 먼 옐로우스톤 어느 geyser 에서
[사진] E. 그리운 미국 집 앞, F. 샌디에이고 서울대내과 동문 모임- 떠나는 날 점심 페어월
[사진] G. 드마리아 선생님과 한 송별회, H. 드마리아 선생님의 비서이자 나의 든든한 조력자 Katherine Greathouse, I. 연구실 동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