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북방의 침략이 있을 때 강화도와 함께 유사시 국가존명을 위하여 대비한 보장처이자 한양외곽 동남부를 관할하는 유수부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는 곳이다. 즉, 남한산성은 외침을 방어하기 위한 폐쇄적인 산악군사 요충지이자 지방행정 중심지로서 읍치를 위한 개방적인 기능을 모두 지니고 있는데 성내 시설이 모두 중요하지만 문(門)은 내부와 외부를 연결해주는 통로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곳이다.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의 지형은 서울방향이 있는 서측이 높고, 동측이 낮은 서고동저의 형태로 특히 서울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서측 성 밖으로는 경사가 급하여 오르기 힘든데, 서문 밖으로 오는 길에 대하여 조선후기 실학자 박제가가 저술한 북학의(北學議)에 따르면 중국으로 갈 때 요동 근처의 산골짜기가 험준하기로 소문난 마천령(摩天嶺)이나 청석령(靑石嶺)과도 비유할 정도이다.
이와 반면 면적이 2.3㎢ 정도 되는 성내부는 분지를 이루어 평탄하면서도 역시 서쪽보다는 동쪽이 조금씩 낮아 성내의 물이 모여 동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성의 동측지세를 보완하기 위하여 우리 선조들은 좌익문을 성안으로 깊이 끌어들여 좌익문 앞으로 오는 적을 양쪽에서 협공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사진 1), 좌익문 진입부 앞으로 계단을 높이 쌓아 말이나 마차가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다.(사진 2)
그림 1. 좌익문 항공사진 |
그림 2. 좌익문 정면 계단사진 |
또한 충북에서 여주, 이천을 거쳐 서울로 오는 길목인 남한산성 내에 광주유수부를 두어 좌익문(동문)으로 들어오면 남한산성 종각에서 ‘T’자형으로 갈라져 지화문(남문)으로 나가 송파나루를 거쳐 서울로 가거나 전승문(북문)으로 나가 광나루를 통하여 서울로 진입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남한산성은 산성 방어를 위하여 철저한 계획을 세우면서도 또한 지방읍치로서 동서교통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데 이중 좌익문은 유일하게 마차가 오르내리는 완만한 지세를 지니면서도 유사시 성곽 방어의 취약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방어를 위한 계획도 철저하게 고려된 곳이다.
좌익문은 1965년과 1973년 등 보수가 이루어 졌으나 문루가 퇴락되어 2014년부터 보수가 시작되었다. 당초에는 문루 보수만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초석 일부가 심하게 침하되고, 육축하부 통로부에 균열이 가는 등 안전상의 문제가 발생될 우려가 있어 전면 해체보수로 변경되었는데 문루가 침하되는 근본원인부터 보수하고자 함이다.
해체과정 중 좌익문에서 들어난 특징은 외부 홍예종석을 기점으로 좌우측의 석축쌓기 방법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좌익문 우측부는 바른층쌓기 하여 인조 축성기법을 지니고 있는 반면 좌측부는 비교적 큰 돌을 얼기설기 쌓아올린 허튼층쌓기로 되어 있는데 설계과정에서는 이와 같은 허튼층쌓기가 1965년 보수시 변형되어 진행된 것으로 판단하였으나(사진 3) 그 이후 1938년 좌익문 사진이 확보되어 예초부터 원형의 축성에서 차이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사진 4) 문화유산의 보수공사에서 고증의 필요성과 고증자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좌익문은 1965년과 1973년 등 보수가 이루어 졌으나 문루가 퇴락되어 2014년부터 보수가 시작되었다. 당초에는 문루 보수만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초석 일부가 심하게 침하되고, 육축하부 통로부에 균열이 가는 등 안전상의 문제가 발생될 우려가 있어 전면 해체보수로 변경되었는데 문루가 침하되는 근본원인부터 보수하고자 함이다.
해체과정 중 좌익문에서 들어난 특징은 외부 홍예종석을 기점으로 좌우측의 석축쌓기 방법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좌익문 우측부는 바른층쌓기 하여 인조 축성기법을 지니고 있는 반면 좌측부는 비교적 큰 돌을 얼기설기 쌓아올린 허튼층쌓기로 되어 있는데 설계과정에서는 이와 같은 허튼층쌓기가 1965년 보수시 변형되어 진행된 것으로 판단하였으나(사진 3) 그 이후 1938년 좌익문 사진이 확보되어 예초부터 원형의 축성에서 차이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사진 4) 문화유산의 보수공사에서 고증의 필요성과 고증자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림 3. 1965년도 좌익문 보수공사 장면 |
그림 4. 1938년 남한산성 좌익문 |
그렇다면 왜 같은 성문 육축에서 쌓는 기법의 차이가 날까? 그 해답을 찾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남한산성의 대표적 고증자료인 중정 남한지(重訂 南漢志)를 보면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취약부이던 동문 부근이 적의 홍이포에 허물어져 이 후 1638년 보수 당시 옆의 수구문과 함께 다시 쌓은 것을 알 수 있다. 대포에 대한 대비로 병자호란 이후에는 좀 더 큰 돌을 사용한 것이다.
우리가 문화유산을 찾는 큰 이유 중 하나는 현장에서 역사를 사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회 진행된 좌익문 보수공사에서도 역사의 흔적을 최대한 보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선조의 얼이 깃든 흔적을 보수하는 일은 자칫 누가 될까 항상 근심만 쌓이는 것도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