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장 베로의 작품에 대한 단상

CULTURE

장 베로의 작품에 대한 단상



성균관대학교 삼성창원병원 천우정



겨울로 접어드는 가을 녘, 창원 촌놈이 근대 서울의 자취가 곳곳에 묻어 있는 정동길을 걸어 <카메라를 든 헝가리 의사 : 보조끼 데죠 1908> 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역사 박물관에 갔었다. 카메라를 든 군의관의 눈에 비친 개화기에 접어든 근대 조선의 이국적인 풍광을 110년이 지난 오늘, 아름답게 채색된 기록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 군의관이었던 보조끼 데죠는 1908년 7월 제물포에 입항 후 서울과 거문도, 부산을 차례로 여행하면서 많은 사진과 기록을 남겼다. 개항 이후 점차 변화하는 제물포의 모습,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의 전경, 외국인 관광객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된 궁궐 경복궁,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운종가, 최초의 도심 공원인 탑골공원, 재건된 숭례문과 전차가 지나가는 흥인지문까지 그가 바라본 근대 서울의 모습은 이국적인 매력을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러나, 이 사진전을 보면서 느낀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현재의 서울의 모습은 런던이나 파리, 로마와는 달리 근대의 모습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너무나 빠른 발전과 변화가 이전 도시의 모습을 추억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또한, 너무나 현대적인 서울 역사 박물관의 모습은 나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서울의 이런 모습에 비해, 내가 보았던 프랑스 파리의 현재 모습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만들어진 오스만 파리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며, 유명 건축물이나 거리 모습 뿐만 아니라, 광고판, 신문 가판대, 가로등의 모습들이 그 시절 디자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파리를 찾은 나에게 정겨움을 선사하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파리를 프랑스 사람들은 과거에 볼 수 없었던 풍요와 평화를 누린 시대인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 시대의 파리’라 하여 지금도 동경하고 있다. 예술과 문화가 번창하고, 거리에는 우아한 복장을 한 신사 숙녀가 넘쳐났으며, 미용 산업과 패션산업이 생겨났고, 물랭루즈, 맥심으로 대표되는 살롱 문화가 꽃피웠던 시기로 많은 소설가와 화가들을 배출한 시기였다.

이 시기의 파리의 모습을 표현한 화가들로는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장 프레드릭 바지유, 귀스타보 카유보트 등이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당시의 아름답고 활기찬 파리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인상주의 화가는 장 베로(Jean George Beraud, 1849~1935)라고 생각된다. 장 베로는 1849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했다. 부모는 모두 프랑스인이었지만, 조각가인 아버지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상트 이사크 성당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태어났다. 파리로 돌아온 장 베로는 법률가가 되고자 법학을 공부하였지만 1870년 보불전쟁 이후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해 초상화가인 레옹 보나(Léon Bonnat)의 가르침을 받았다. 1873년 처음으로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했고, 이후 꾸준히 살롱의 문을 두드렸지만 1876년까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 즈음 인상파의 새로운 매력에 끌려, 밝고 활달한 붓놀림으로 파리지앵의 일상을 캔버스에 담기 시작했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교외로 나갈 때, 그는 오히려 파리의 중심에서 도시적 삶의 형태와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그는 파리지앵들의 생생한 모습을 화폭에 담기 위해 마차를 아틀리에로 개조해서 거리 모퉁이에 마차를 세워 놓고 하루 종일 작업을 하곤 했다. 마차 안에 앉아 스케치를 해 밑그림을 완성했고, 자기가 본 그대로의 배경을 묘사하기 위해 사진을 찍은 뒤 그것을 따라 그리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그렇게 해서 포착한 파리의 풍경은 세련되고 낭만적인 흥취로 가득하였다. 장 베로가 남긴 500여 점의 작품 중에는 ‘카프신뉴 거리’ 같은 유독 파리의 대로변을 그린 작품들이 많다. 카페의 빨간 차양과 상점의 하얀 차양, 볼록한 지붕을 한 광고탑, 고풍스러운 검정색 난간에 걸어 놓은 금색의 상점 간판, 거리의 의자, 가로등의 모양까지도 지금과 똑같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풍요와 세련된 멋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도시의 이면에 존재하는 일용직 노동자와 먹을 것을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도 놓치지 않았다. 기존의 살롱전에 회의를 느낀 장 베로는 몇몇 화가들과 함께 프랑스 국립예술협회를 창설하고, 1890년부터 1929년까지 매년 이곳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시기부터 그는 화가로서보다는 전시회 기획자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는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 사이에서 큰 인기가 있었으며, 사교계의 주요 인사로 환영 받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1935년 파리 몽파르나스에 묻혔다. 유난히 예쁜 색채와 로맨틱한 묘사, 그리고 사교계에서의 인기 때문인지 후에 그의 작품에는 ‘여성 취향’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이로 인해 그는 한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였음에도 제대로 된 전시회나 연구서조차 드문 화가로 남게 되었다.

우리에게도 장 베로처럼 그 당시의 풍경을 잘 담아낸 화가가 있었다면,,,,
또한, 잘 보존된 근대 건축물과 거리가 남아 있었다면…..


그림. “Boulevard des Capucines”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