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in KSIC / 심장내과의사 생활의 책갈피, 찬란한 샌디에고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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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내과의사 생활의 책갈피, 찬란한 샌디에고 1년



한림의대 강동성심병원 김성은

서울은 하늘을 보기 어려운 도시입니다. 회진을 마치고 연구실을 건너가는 좁은 골목에서 고개를 꺾어들고 그 존재를 잊지 않으려고 올려다 보는 건물 사이 손바닥만한 하늘에서, 푸르고 또 파란 긴 수평선의 샌디에고를 떠올리게 됩니다.

2016년 8월, 1주일 단위의 마감을 겨우 해치우고 끊임없는 불안으로 메꾸는 어수선한 날들을 접고 샌디에고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치사한 입국심사의 기억으로 10년간 가지 않았던 미국으로, ‘생활’을 시작하러 떠나는 마음 또한 불안이었으나, 가족이 함께여서 담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샌디에고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 최남단, 멕시코와 국경을 둔 도시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아가씨네에서 받은 시에나를 타고 남편과 둘이 미국 고속도로를 처음 달리던 그날, 가도 가도 계속되는 그 도로가 너무나 이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톨게이트도 없고, 휴게소도 없는 도로. 막히지도 않고 7시간을 왔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고속도로. 아이들을 맞이할 집을 하루 빨리 갖추어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 도로에서 샌디에고 전기, 가스 회사에 계속 전화를 걸었습니다. 40분을 기다려서 겨우 통화가 되고 대체 무슨 이런 나라가 있는 걸까 생각했던 건 제가 빨리빨리 한국에서도, 몇 가지 방법으로 일을 빨리 해결할 줄 안다는 서울 사람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진 1.> Washington 에서 열린 ACC 2017 기간에 Dr. Mintz 가 저희를 집으로 초대하여 손수 저녁을 대접하였습니다.

<사진 1> UCSD School of Medicine 정경과 Dr. Tsimikas
 
<사진 1.> Washington 에서 열린 ACC 2017 기간에 Dr. Mintz 가 저희를 집으로 초대하여 손수 저녁을 대접하였습니다.

<사진 2> 마침 4학년이었던 딸 덕분으로 꽤 되는 국립공원 입장료가 모두 무료!
 

당연한 듯 한 국가에 속하고, 그 삶을 보장받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던 저에게 미국 비자는 생소한 제도였습니다. 내가 환영받지 못하고, 내가 존재해도 된다는 걸 증명하고 허락 받아야 한다는 그 절차에 빠진 부분이 있어서 우리 가족은 아이들의 비자 변경을 위해 멕시코 로스카보스에 이른 휴가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한달 맡아준 아가씨네 가족, 그리고 시부모님과의 여유로운 시간을 칸쿤에 버금간다는 멕시코 리조트에서 보내고, 아이들은 학교로, 저는 UCSD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연구실은 UCSD 캠퍼스 내에 Biomedical Science Building이어서 fellow로 일하고 있는 Calvin Yeang이 병원 투어를 해 준 하루를 제외하고는 UCSD 실험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Boss인 Dr. Tsimikas는 자의 스승이신 한규록 교수님을 첫 방문 교수로, 거의 10명에 가까운 방문 교수를 둔 interventional cardiologist입니다. 최근에는 월 1회 MI call만 받고, 한 달에 한번만 클리닉을 보고 대부분 Lp(a)나 oxidized LDL과 관련된 동맥경화증 연구에 시간을 보내십니다. 세계 각지의 학회나 미팅 참석으로 자리를 비우는 경우도 많았지만 1주일에 한번 저를 위한 면담 시간을 두고 공부할 내용들과 실험의 진행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배려해준 좋은 선생님이셨습니다. 동맥경화증의 pathophysiology 규명에 다가가려는 다양한 국적의 연구원들이 함께 하는 컨퍼런스는 거시적으로 제가 접하고 있는 동맥경화의 결과의 원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공부하는 좋은 자극이었습니다. 실험 경험이 없는 저로서는 1년 내에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는 실험 중 Dr. Tsimikas가 보관하고 있는 다량의 샘플로 Lp(a)를 측정하는 ELISA를 주로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8500여개의 샘플로 실험하느라 마지막 3개월에 걸쳐 빡빡하게 결과를 내고, 한국에 귀국하기 전 한 달에 걸쳐 최남단 샌디에고에서 출발해서 캐나다 벳푸까지 운전하며 돌아본 미국의 서부 지역 국립공원들은 미국에서 본 훌륭한 시스템 중 손에 꼽을 하나입니다. 도시가 중심이 되는 유럽 여행에 비해, 광활하고 아름다우며, 무엇보다도 너무나 잘 보존된 자연의 미국은 이 연수 생활 1년이 아니었다면 알 수 없는 세상이었을 것 같습니다. 텐트를 치고, 어두워지기 전에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고단한 일정의 캠핑은 아이들과 함께 눈뜨고 같이 일하고 먹고 놀며 만든 소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각자 바쁘게 일하고 살며 알지 못했던 부부가 서로 의지하고 한 곳을 보며 나아갈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고, 내가 혼자였다면 생각하지도 해내지도 못할 소박하고도 굉장한 여행이기도 했습니다.

 
<사진 3> Arches National Park. 자연의 위용을 보려면 땡볕을 한참 걸어가야 합니다.

<사진 3> Arches National Park. 자연의 위용을 보려면 땡볕을 한참 걸어가야 합니다.
<사진 4gt;  Zion National Park - The Narrows trail. 세상에 별로 없을 경험입니다.

<사진 4> Zion National Park - The Narrows trail. 세상에 별로 없을 경험입니다.
 

미세 먼지로 야외에서 달리기를 할 수 없는 서울에서 런닝머신을 하러 가다 보면, 샌디에고 바다가 한켠에 보이던 토리힐즈 네이버후드 공원에서 한결 같은 햇살 아래 달리기를 하던 그 날들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꼭 5개월쯤 지났을 때, 헉헉 거리며, 지나가는 다람쥐를 피하던 그 공원에서 내가 왜 심장내과를 선택했었는지 다시 떠올릴 수 있었던 기억으로, 3개월짜리 단기 연수였다면 만들 수 없었을 책갈피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10년이 지났더니 너덜너덜해진 삶을 겨우 털고, 기워서 돌아온 이 자리가 아직도 버겁긴 하지만, 제가 누렸던 그 특권이 얼마나 더 소중한지 감사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할 일이야 열심히 지내는 것뿐이겠지만, 인생의 다시 없을 찬스를 써버린 지금 희망은 또 무엇이어야 하나 가끔 생각하게 되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