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와인 이야기

CULTURE

와인 이야기



성균관의대 강북삼성병원 김병진

Chapter 1. 웃을 거리 별로 없다?

유독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올해 여름이지만 작년과 달리 그래도 하늘이 너무 푸르다. 최근 우리사회는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흉악한 범죄가 경쟁하듯 많아지고, 대외적으로는 위치를 바로 잡지 못해 위태한 행보를 반복하는 듯하다.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마치 국회를 방불케 하듯 열띤(?) 토론을 하다 결국 어딘가를 겨냥해 앞다투어 ‘상처’ 와 ‘보호본능’ 이라는 활의 시위를 당기곤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전사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뭔가에 홀린 듯 정신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아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필자의 하루도 다를 바 없다. 요즘 우리에게는 웃을 거리가 별로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웃을 거리를 찾을 시간이 많지 않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e뉴스레터 편집자로부터 와인 관련 투고를 부탁 받고, 필자는 잠시나마 고민에 빠졌다. 소주와는 사뭇 다르게 ‘와인’ 하면 왠지 격식을 차려야 할 것 같고, 아는 것 같아도 무엇을 아는지 잘 모르는 듯, 가까워하기엔 너무 먼 당신 (PCI를 하는 우리들에게는 아마 CTO병변 정도) 이지 않을까? 품종은? 빈티지는? 거기에다 맛에 대한 고급스러운 멘트 한마디는 던져야 할 것 같은 와인……

쫓기듯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잠시의 쉼이 있는 삶이 되길 바라며, 본고에서는 이러한 와인의 복잡한 지식보다는 와인과 관련된 흥미로운 옛 얘기로 채울까 한다.

1. 코카서스 (Caucasus), 와인의 기원

History-evidence로 볼 때, 인류 역사상 최초의 술은 와인이다. 실제 언제 어디서부터인지는 여전히 명확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초기 역사는 기원전 수천 년 무렵 코카서스 (Caucasus) 지역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코카서스 지역은 현재 흑해와 카스피해를 사이에 둔 지방으로 조지아 (Georgia), 아르메니아 (Armenia), 아제르바이잔 (Azerbaijan) 3국이 위치하고 있는 매혹의 땅이다 (그림 1). 기원전 6~7천년전 조지아의 카헤티 (Katheti) 에서 최초로 포도를 재배한 흔적이 발견되었고, 이후 와인용기의 일부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지금도 이 지역에서는 오크통이 아닌 황토로 만든 크베브리 (Kvevri) 라는 항아리에 포도를 넣어 땅속에 묻어 발효시키는 조지아 전통와인제조방법을 사용한다 (그림 2). 마치 우리 옛 선조들이 김치를 발효하기 위해 만들어 사용했던 김장독 같다고 해야 하나? 또 다른 문헌에서는 이보다 빠른 시기에 중국에서 술을 빚은 증거를 보고하기도 하였지만, 쌀이나 다른 과일과 함께 발효하여 만들었기에 와인의 최초라 말하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그림 1. (출처: 네이버 이미지)



그림 2. (출처: 네이버 이미지)


언제나 그렇듯이 와인의 시작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설화(?)는 존재하는 법, 포도를 좋아하는 왕과 자살소동의 후궁에 대한 이야기이다. 왕은 포도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저장창고에 가득 쌓아 보관하여 즐겨 먹었는데, 아래쪽에 깔려있던 포도들이 터져 자체 발효가 되어 가스가 가득 찼었다. 이런 상황을 모르고 종들이 저장창고에 들어가서 그 가스에 질식을 하였는데, 왕의 총애를 잃은 후궁이 이것을 듣고 저장창고 바닥에 있던 포도액을 독으로 여겨 죽을 목적으로 마셨다고 한다. 그런데, 후궁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져 노래와 춤을 추었고 이것을 지켜본 왕은 저장창고에서 나온 포도액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기묘한 액체라고 생각하여 이 포도액을 만들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전설들이 몇 가지 더 있지만, 믿거나 말거나 한 서양설화에 많이 등장하는 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얘기들이다. 또 다른 와인에 대한 이야기는 기원전 수천 년 무렵 구약성서의 노아 시대의 것이다. 대홍수 후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 포도나무를 심었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때 방주가 머물렀던 곳이 아라랏산인데, 아라랏산맥은 현재 코카서스 지역에 위치한다. 아무튼 이렇게 시작된 와인은 그리스 로마시대를 거쳐 로마제국에 의해 유럽으로 확산된다. 의사국가고시를 합격한 의사라면 누구나 히포크라테스선서를 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고대 기원전 히포크라테스 역시 질병예방과 상처부위 소독 등에 와인처방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2. 와인계의 우량주, 보르도 (Bordeaux) 와인: 그 유명세는 어디로부터 왔나?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보르도 (프랑스어로 ‘물 가까이’ 라는 뜻이라 한다.),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보르도 와인이라면 왠지 우아하고 고급스러움을 떠올릴 것이다. 샤토 마고 (Chateau Margaux), 라투르 (Latour), 라피트 (Lafite), 오브리옹 (Haut-Brion) 등등, 그 이름만으로도 심장이 두근두근, 보르도 지역의 대표와인들이다. 몇 해전 필자는 와인의 기원지인 코카서스지역은 아니지만 카스피해 동쪽인근에 위치한 한 나라를 방문하였는데, 한 레스토랑의 와인저장고에서 앞에 열거한 와인들을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좌청룡 우백호인 냥 양손에 마고와 라투르를, 눈앞에 무통-로쉴드 (Mouton-Rothschild) 와 오브리옹을 (그림 3-1, 3-2), 그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다. 블렌딩의 환상적인 비율과 탁월한 숙성력을 자랑하는 보르도 와인은 현재 와인계의 최고블루칩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림 3-1. 우즈베키스탄의 한 레스토랑에서 (좌라투르 우마고)



그림 3-2. 우즈베키스탄의 한 레스토랑 와인저장고 (무통-로쉴드, 샤토 라투르, 샤토 오브리옹, 샤토 마고)


보르도 와인이 전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는 계기를 설명하려면 중세시대 프랑스-영국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보르드 와인을 ‘여왕의 와인’이라 칭하는 이유기도 하다. 12세기 서유럽의 중세 전성기 시대, 아키텐 공국의 최고권력자이자 매력의 화신이라 칭송하였던 여공작 알리에노르 다키텐 (Alienor d’Aquitaine)의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당시 아키텐 공국은 상위 국가인 프랑스 왕국보다 몇 배 더 넓은 땅을 다스리던 부강한 시절이었다 (그림 4). 알리에노르는 아키텐 공국의 공작 기욤 10세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15세에 광활한 영토를 물려받고,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을 하여 프랑스 왕국의 왕비에 등극하였다. 하지만, 팔방미인이었던 알리에노르는 파리의 결혼생활이 마냥 즐겁지만 않은 터, 루이 7세와 15년간의 결혼 생활을 청산하면서 결혼 전의 영지를 되돌려 받았다. 이후 알리에노르는 이혼 3개월만에 앙주 백작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헨리 2세와 재혼을 하여 (무려 열한 살, 연하 남과 다시 재혼을 한 것을 보면 당시 알리에노르의 권력과 미모를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프랑스 왕비에 이어 영국 왕비에 등극하게 되었다. 당시의 결혼관습은 신부의 재산은 모두 결혼지참금이 되었기 때문에 영국 왕실은 풍요로운 보르도 지역을 단숨에 얻게 되었다. 풍부한 강줄기를 끼고 있는 보르도 지역은 지하수 오염으로 식수공급이 쉽지 않았던 영국에게 황금알이 되었고, 당시 영국령이었던 보르도의 와인은 짧은 뱃길을 이용한 덕에 와인의 보관상태가 좋았고, 또한 관세를 부과하지 않고 통관절차에 있어서도 많은 혜택을 주어 영국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보르도 와인이 특성상 오랜 숙성 기간을 거칠수록 질 좋은 와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영국인들은 상하기 쉬운 와인을 위해 특수 보관창고를 만들어 와인이 출시될 당시 저렴하게 사서 훗날 고가에 되팔아 수익을 극대화하였다. 검붉은 진한 빛깔을 지닌 여왕의 와인, 보르도 와인은 프랑스 와인의 대표와인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영국인의 사랑과 투자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림 4. 아키텐 (Aquitaine) 공국,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출처: 나무위키)


마치며

본고에서는 와인의 지식적인 복잡함보다는 와인에 대한 인문역사학적인 옛이야기의 일부만 담았다. 너무나도 깊고 복잡한 와인 세계, 하지만 와인전문가들도 창피를 면치 못한다. 와인도사는 없다. 따라서 와인을 좋아하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와인을 잘 알지 못해도, 잘 표현하지 못해도 면책사유는 있을 것이다. 여성 와인평론가인 잰시스 로빈슨 (Jancis Robinson)은 ‘와인은 그 자체가 즐거움이다. 따라서 어떤 특별한 재능이 요구되지 않는다. 와인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는 편견 외에 별다른 것을 발견할 수가 없다’ 고 하지 않았던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기 마련이다. 본고가 지면에 나올 때쯤이면 와인을 즐기기에 최고의 계절일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한 여인을, 구약성서의 대홍수 후 신세계를, 그리고 중세의 절세미인이었던 알리에노르를 떠올리며 진홍빛의 보르도를 품은 채 웃을 거리를 만들어 보는 여유를 가져 보기를 바란다.